

<책 소개>
겹겹의 파도에도 무너지지 않을 단단하고 충만한 세계
실패하고 좌절해도 분명 우리는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
한국문학의 새로운 이름, 김준희의 첫 번째 소설집 『파도보다 더 높이』가 출간되었다. 이 소설집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미세한 균열과 어긋남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사회초년생, 전세 사기, 방치된 폐업 주유소, 명품주의, 아동 혐오, 교권 추락, 외국인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일곱 편의 이야기가 '사회 문제'라는 이음새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김준희 소설에는 "허구를 빌미로 비현실적으로 과감해지려는 방탕한 객기"(전청림(문학평론가))가 없다. 소설 속 인물들은 번번이 좌절하고 슬픔의 수렁에 빠지지만, 김준희는 슬픔을 덧칠하지 않고 실패를 미화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투명하게 그려내며 희망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겪은 시간을 조심스럽게 끌어안는다. 무엇보다 삶이란 늘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며 그럼에도 나아가야만 하는 일임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우리에게 건넨다. 그렇게 이 소설집은 세차게 휘몰아치는 세상으로부터 무너지지 않으려는 마음, 기어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몸짓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작가 소개>
김준희
199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제3회 아코디언북 짧은소설 프로젝트, 제3회 미니픽션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
선한 사람에 대해 쓰고 싶었다. 필연성이나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는, 아무런 계산 없이 불쑥 등장하는 그들에 대해.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2025년 봄
김준희
<목차>
정오의 언어 7
건호를 찾아서 33
주유소 캐노피 아래에서 슬라임을 생각한다는 건 65
오픈런 91
파도보다 더 높이 119
별을 보러 갑니다 147
해안로 175
해설 | 전청림(문학 평론가)
적당한 점액질의 인간 농도 201
작가의 말 227
<책 속에서>
그녀는 점심시간이 되면 탕비실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통화를 할 때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사용했기 때문에 혼잣말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의 점심 메뉴는 주로 빵이나 컵밥이었다. 이런 것들은 대체로 십 분, 십오 분이면 다 먹을 수 있어서 여유 시간이 꽤 남는 편이었다. 그녀는 그 시간을 모두 통화하는 데에 썼다.
「정오의 언어」 중에서
점심시간의 탕비실은 온전히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탕비실을 공유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내가 탕비실로 들어갈 때마다 그녀는 빨리 먹고 나가라는 수준을 넘어, 도대체 네가 왜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차원의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마주하다 보면 탕비실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게 절로 느껴지곤 했다.
「정오의 언어」 중에서
기차가 서울을 벗어날 때쯤 나는 왜 Y시에 가려고 하는 건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건호에게 데뷔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미쳤냐고 호통치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며 하염없이 거리를 떠돌다가 건호와 마주치는 우연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건호가 사랑하는 사람, 죽었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도대체 누가 죽었길래 그 사람이 죽었다는 이유로 꿈을 접게 된 건지 궁금했다. 나는 팬이라는 이유로 건호를 꽤 알고 있다고 여겨 왔지만, 그 게시글을 본 순간 건호를 티끌만큼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건호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아이돌이 되려고 했던 건지, 아이돌을 때려치우고 싶어서 아무 핑계나 대는 건지, 그도 아니라면 정말 국가적인 문제라도 개입된 건지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물론 Y시에 간다고 한들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만히 누워 밤을 지새우고 싶지는 않았다.
「건호를 찾아서」 중에서
높이 떠 있는 캐노피를 보고 있으니 마음 한편에 위로 비스름한 감정이 일었다. 주유소도 폐업하는 마당에 슬라임이 망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응, 아무것도 아니지. 주유소가 폐업한 것과 케이가 슬라임 사업을 접은 건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폐업한 주유소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위안이 들었다.
「주유소 캐노피 아래에서 슬라임을 생각한다는 건」 중에서
“가죽의 광이…… 살짝 아쉬워요.”
직원이 손바닥으로 가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가죽을 유심히 보았다. 이게 광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직원의 말대로 가죽에 광이 좀 아쉽다고 해도 그건 나랑 상관없었다. 어차피 되팔 거니까. 나는 속으로 잘 하면 백오십만 원 못 해도 오십만 원을 되새겼다.
「오픈런」 중에서
“도리야.” 나는 도리를 불렀다.
“왜?” 도리가 대답했다.
“파도는 어떻게 타는 거야?” 내가 묻자 도리가 킬킬거리며 “그건 왜?”라고 되물었다. 이모는 파도를 타본 적이 없어서 모르거든, 같은 말이 떠올랐지만 “그냥”이라고 답했다. 도리가 웃음을 띤 채로 외쳤다.
“파도보다 더 높이 점프!”
머릿속에 도리가 춤을 추다가 몇 번이고 점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노래에 맞춰 신나는 부분에 하늘을 향해 점프하는 모습이. 도리는 이제 점프하는 일을 땅이 아닌 물 위에서 대입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물속으로 떨어질 것 같아도, 물살이 등을 떠밀어도, 파도가 덮치기 직전에도, 파도보다 더 높이 점프하는 일을 몇 번이고 연습하면서.
「파도보다 더 높이」 중에서
“그 새끼들이 모두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아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빈은 그 새끼들이 학생들인 건지, 학부모들인 건지, 산성 위에서 만났던 무리인 건지 분간되지 않았다. 아리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빈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은 산성 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멀어져 있었다.
「별을 보러 갑니다」 중에서
다시 형형색색의 현수막. 부서진 과속 방지턱. 또다시 태연하게 나타나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기울어진 소나무. 낡은 자전거. 형형색색의 현수막. 부서진 과속 방지턱⋯… 나는 달리는 걸 멈췄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12월 31일 22시 50분.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일었다. 12월 31일은 일주일 전이었고 나는 분명 새해를 맞이한 기억이 있었다.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켰다. 여전히 12월 31일 22시 50분이었다.
「해안로」 중에서
<출판사 서평>
압도적으로 높은 파도 앞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출발 지점에 선 것처럼 온몸이 휘청거리는 긴장 속에서도 한 줄기의 맹렬한 신뢰를 보여준 김준희의 소설은 주저하지 않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사랑은 악역으로 보였던 인물을 서서히 존중받게 만드는 치열한 고민 속에서, 무기력한 아픔을 뚫고 타인에게 공감하고 존중할 줄 아는 겸손 속에서, 남모를 이에게 무운을 빌어줄 줄 아는 성숙함 안에서 등장한다. 우리가 믿고 싶은 근본적인 인간 신뢰가 계속되는 불운과 무기력한 상황을 헤치고 서서히 드러날 때, 있는 듯 없는 듯, 깊은 지하 속에 파묻혀 있는 것만 같은 그것이 살살 먼지를 털고 등장할 때 김준희의 소설은 사랑을 믿거나 의도하는 것이 아닌 뼈에 이식된 것만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드러낸다. 이 오묘한 서사가 계속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인간의 농도가 가장 짙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대해 왔던 것이 한결같은 무늬로 쌓여있는 소설의 갖추어진 정결함을 보며 생각한다. 툭 튀어나온 뾰족함이 아니라 변화에도 개의치 않는 씩씩함이야말로 인간의 농도를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노라고 말이다. 오전과 오후 사이를 당겨오는 미묘한 정오의 시차처럼, 고체와 액체 사이의 탄성을 유지하는 슬라임의 적당한 물성처럼, 바로 그렇게.
전청림(문학평론가) 해설 「적당한 점액질의 인간 농도」 중에서
<서지 정보>
제목 : 파도보다 더 높이
저자 : 김준희
출판사 : 출판사 결
발행일 : 2025년 5월 1일
분야 : 국내소설
시리즈 : 소설과 결
쪽수 : 232쪽
판형 : 130*190mm 무선제본
가격 : 15,000원
ISBN : 979-11-992356-0-1(03810)
파도보다 더 높이 / 김준희